ㅤ집이라는 걸 만들고 싶었군. 스미요시가 구현한 ‘공간’에 대한 이카보드의 감상은 그것이었다. 집에는 스미요시의 냄새가 그득했다. 이카보드가 종종 인간 냄새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에, 스미요시 특유의 무엇인가가 첨가된 향이었는데… 이카보드로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아직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 그러나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인간의 가치에 얽매지 않으려 살아온 나날이 길었다. 이런 건 있어도 없어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 이카보드는 생각하려 했다. 다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카보드가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게 하겠다는 스미요시의 의지가 구석구석 엿보이기 때문이리라. 두꺼운 암막 커튼에 잠시 시선을 주던 이카보드가 스미요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ㅤ스미요시는 막 이 한 장을 꺼내드는 참이었다. 결이 살아있는 것이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잘 보였다. 고급 종이. 옛 방식으로 만든 양피지가 아님이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중요한 순간과 잘 어울리는 물건을 찾는 건 좋은 재능이었다. 이카보드는 스미요시와 탁자를 사이에 둔 소파 위에 기대 앉았다. 긴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스미요시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카보드는, 오로지 저 하나만을 위한 계약의 순간에도 매사에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점이 스미요시의 깊은 곳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모른 채로. 스미요시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되짚어 보아도 이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ㅤ아, 스미요시는 정말이지 이카보드를 욕망했다.
ㅤ추잡하고 더러운 감정이 아니다. 욕망 자체의 욕망. 욕망하기 위한 욕망. 욕망에 의한 욕망…….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 고결하고 깨끗하다. 이카보드가 듣는다면 고개를 돌리거나 비아냥거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스미요시는 제 감정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비어있는 백안이 이카보드의 모든 것을 살폈다. 스미요시는 확실함을 원했다. 길고 가뿐한 몸으로 어디로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를 그저 두고만 보는 것이 어쩌면 두려웠다. 이카보드가 자신의 체면과 이익을 위해 언약을 쉽게 깨버릴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태여 계약서를 쓰고자 한 것은 그 탓이었다.
ㅤ“언약의 내용과 그다지 달라질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이카보드가 소파 위에서 다리를 뻗었다. 긴 다리 탓에 일인용 소파는 분에 넘치는 이를 받아내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나마도 허벅지 절반부터는 바깥으로 비져나온 꼴이었지만. 스미요시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요.” 누르면 그대로 들어갈 것 같은 공허의 물성을 가졌으면서도 이런 구석에서는 묘하게 확실한 것이 스미요시였다. 이카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ㅤ“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요.”
확실하게. 스미요시는 근래 들어 그런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것이 이카보드의 심기를 거스름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ㅤ“이몸을 의심하나?” 이카보드가 발끝을 까닥거렸다.
ㅤ“그럴 리가요.” 스미요시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건너편의 이카보드와 눈을 마주쳤다.
ㅤ“그건…….”
ㅤ“그건 무엄한 일이니까, 의심하지 않아요….”
ㅤ이카보드가 입술을 멈추었다. 제 말을 빼앗고도 무구하다는 눈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스미요시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카보드가 손을 들어 제 눈 위를 덮었다. “빨리 쓰도록 하지.” 명령조였으나 말 끝에 은근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스미요시와 대화할 때면 이카보드는 언제나 이러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하게 착취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구분이 되어 있는 관계임에도. 주도권을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음에도.
ㅤ만일 이카보드가 적당하고 다양한 인간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더라면, 그런 고민에는 빠지지 않았을 터였다. 금방 아무런 무리 없이 스미요시가 가진 복합적인 결핍에 대해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카보드는 그런 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이카보드가 눈을 반쯤 뜬 채 스미요시의 행동을 주시했다. 스미요시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이미 입을 맞춘 사항에 대해서도 신중함을 가하려는지 미간은 좁아지고 입술이 살짝 모인 채였다.
ㅤ뭐하러 모든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걸까. 이카보드는 생각했다. 뭐 때문에 하나하나에 성의를 다하고 마음을 기울일까. 이카보드가 보는 스미요시란 그런 사람이었다.
ㅤ“아시겠어요?” 스미요시가 펜을 멈추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노려보던 이카보드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뭘 말이지?” 이카보드는 권태와 방어 두 가지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스미요시로선 틈을 노릴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하게. 스미요시는 그 사이 틈이 있는지를 살피듯 눈을 굴리다 펜을 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당신이 갑, 내가 을이에요.” 그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는데, 그 모습이 믿을 수 없도록 연약하게 보였다. 속눈썹과 눈꺼풀 위로 눈송이가 내리는 착각이 들 만큼. 이카보드가 낮은 테이블 위 놓인 종이를 보았다.
ㅤ“당연한 말을.” 오만한 투였으나 밉지 않다. 이카보드가 가진 최대의 재능이라면 분명 저것을 꼽으리라. 스미요시는 웃어 넘기며 한참을 끄적거리던 종이를 이카보드 쪽으로 돌려 주었다. 몇 개의 간략한 문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기에 흠결이 없었다. 이카보드의 눈동자가 줄곧 한 곳에 맺혀 있다가, 천천히 줄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필요할 것을 약조한다.” 이카보드의 음성에 조소가 묻어났다. 이카보드는 언제나 한 글자 한 글자를 귀중히 여기는 듯 눌러 발음하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듯 음성을 흘려버리곤 했다. “이제와서 무를 순 없어요….” 스미요시가 입가의 점을 만지작거리며 강조하고는 손을 내렸다. 아닌 척을 해도 꽤 초조한 모양인지,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일정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벼운 소리. 톡, 톡, 톡……. 거슬린다는 듯 스미요시의 단정한 손가락을 힐끗 곁눈질하던 이카보드는 다시 계약서가 그를 향하도록 돌렸다.
ㅤ“대가성에 충분히 부합한다면 필요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카보드는 계속해서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렇게 원하던 물질적 증거만이 남았군.” 나른한 짐승 같은 음성. 스미요시는 이카보드의 마지막 문장을 듣기 무섭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ㅤ피를 내는 것은 한순간이다.
ㅤ스미요시의 손끝에서 핏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본능적으로 이카보드의 입가 근육이 움찔거렸다. 스미요시는 어쩐지 후련한 표정이었다. 동시에 놀이기구를 눈앞에 둔 아이의 표정 같기도 했다. 그 복합적인 것에 시선을 오래 두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피는 빠르게 종이에 스며들며 굳어갔다. 이제 이카보드의 차례였다. 스미요시의 눈동자. 빛도 어둠도 구분하지 않는 투명함이 이카보드를 향했다.
ㅤ“알고 있다고.” 이카보드가 진저리치듯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소매를 걷었다. 흡혈귀에게 제 피를 내어 서명하라는 법을 만들고자 한 사람은 최악의 변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카보드의 앞에 있었다.
ㅤ이카보드의 핏물이 추락하자 스미요시는 남몰래 어깨를 떨었다.
ㅤ“…… …….”
ㅤ“계약의 물증이다.” 이카보드가 적선하듯 말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사위의 한가운데에서, 허리만을 곧게 세우고 앉은 흡혈귀가 있다. 스미요시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이걸로 되었겠지?” 다른 말을 붙이지 말라는 으름장이 분명했다. 신체의 훼손이 기껍지 않은 데다 간만의 일이었으므로, 이카보드의 심기는 그다지 편하지 않은 쪽이었다. 그는 핏물이 점차 가늘어지다 잦아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머리칼 끝에 멍하니 시선을 주던 스미요시가 핏물로 찍힌 서명을 응시했다.
ㅤ“…… 네.” 스미요시는 확언했다. 그 어떤 도장보다 확실한 음성이었다. 이카보드는 드물게도 흡혈하지 않고도 차오르는 감각, 무엇도 충족했을 리 없으면서 느껴지는 충족감에 작게 혀를 찼다. 인간들이 어디에 매달리며 왜 매달리는지를 알아버린 기분이었고…… 탓에 불쾌했다.
ㅤ그런 이카보드의 감정과는 별개로 스미요시는 여전히 뛰는 심장으로 웃었다.
ㅤ이로써 완전하게, 필요에 의한 맹세요 맹세에 의한 필요가 충족된다.
ㅤ스미요시는 불꽃처럼 일어나는 욕망에 허기를 느꼈다.
ㅤ“욕심은 금물이다.” 그보다 몇 수를 벌써 앞서 알아버린 사람처럼, 이카보드가 덧붙였다.
ㅤ“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이니까요.” 스미요시가 속삭였다. 어느새 발긋하게 상기된 양 뺨 때문인지 그는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였다. 그가 천천히 계약서를 집어 들고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를 연거푸 읽었다. 천천히 떠오르는 환희가 어둑한 집안의 그늘에 묻힌다. 이카보드는 계약을 마친 뒤로 한 번도 스미요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스미요시는 앞으로 시간을 들여……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으니까. “욕심은 금물.” 스미요시가 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벌어진 상처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욕망으로. 순수할 뿐인 욕망으로. ■